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문단 편집) == 성립 배경 == [[아우구스투스]]는 두 차례 내전을 벌여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 첫 번째는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내전이었고, 다음은 동지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싸운 내전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를 배려하지 않으면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공화정 복귀 선언을 하는 등, 모양새만큼은 1인 지배 체제가 아닌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는 1인 지배 체제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그 다음 주자, 그 다음에는 다시 다음 주자가 안정적으로 제위를 이어가도록, 즉 항구적인 체제를 만들어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중심으로 왕조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혈통 중심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즉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아닌 사람이 제위에 앉으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우려했다. 개인사적으로 어렸을 적에 부유한 집안 출신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입지 없이 (본인의 정치 욕심이 어쨌건 간에) 조용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종조부]]가 양자로 지명해서 순식간에 로마를 뒤흔들 정도의 권력을 얻었다는 점이 당시 시대의 혈통의 중요성을 본인에게 정확히 지각시켜 주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는 네로 사후에 그대로 적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시에 자신의 혈통으로는 왕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속했던 옥타비우스 가문은 평범한 지방 유지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게 됐지만, 공화정 전체에서 놓고 봤을 때 당시 율리우스 씨족은 몰락한 귀족 가문 정도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유서 깊은 클라우디우스 씨족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보강하는 동시에, 유력 씨족과의 연합을 통해 정권을 안정화하려 했던 것 같다. 뒤에 쓰겠지만,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알바롱가 출신으로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유서 깊다는 명문가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혈통상으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이었고,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출신의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라는 두 아들을 데려왔다. 이 둘은 리비아의 전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리비아 드루실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후손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 역시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에 시집가 마르켈루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에게 딸 대 율리아를 시집보내 ― 사촌 간의 근친혼이다 ―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마르켈루스는 요절했고, 애통해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어 그를 기렸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중요한 패였지만 일찍 요절해 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흑역사.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가 숙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들 역시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조카들이었으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이는 안토니우스파와의 상징적인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대(大) 안토니아는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에 시집가 네로의 할머니가 되었고, 소(小) 안토니아는 앞서 언급한 대 드루수스와 결혼해 클라우디우스 1세의 어머니이자, 칼리굴라와 소 아그리피나의 할머니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